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키르쿠크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나디르 샤는 잠시동안 병력과 장비를 재정비하고 물자를 확보하는데 주력하였으며, 토팔 오스만 파샤는[* 여기서 토팔은 오스만 파샤의 별명인데 튀르키예어로 절름발이라는 뜻이다. 왜 이런 별명이 붙었냐면 오스만 파샤가 젊은 시절에 이집트의 오스만 해군에 복무하면서 스페인 사략선들과 전투를 벌였을때 전투 도중 발에 상처를 입어 한쪽 발이 불편하고 절게 되면서 절름발이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다.]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바그다드]]에 있던 페르시아군 3만을 격퇴시키고 바그다드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당시 바그다드는 몇 달간의 포위전으로 인해 식량이 바닥났으며, 수많은 시민들이 죽은 상태라 도시 자체를 복구하기도 바빠 오스만 파샤의 대군을 수용해줄 처지가 되지 못했다. 별 수 없이 토팔 오스만 파샤는 군대를 이끌고 키르쿠크(Kirkuk) 지역으로 북상하여 거처를 잡았다. 나디르 샤는 1733년 8월 4일에 하마단(Hamadan)에 도착하여 2달간 재정비를 한 뒤 10월 2일에 키르쿠크 지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내에서 반란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디르 샤는 군대를 퇴각시키는 대신 자신의 사람을 보내 협상으로 반란세력의 발목을 최대한 붙잡으면서,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할 심산이었다. 토팔 오스만 파샤도 사정이 안좋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사마라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던지라 손실을 채워야 했는데, 질 낮은 시리아계 병사로 대충 채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토팔 오스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의 전투력 감소가 불가피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